공자의 학적 지식 획득 방법론, 즉 인식론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 명제’는 누가 보아도
<논어> 「위정」편의 다음 명제일 것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공허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 ‘경험지식’이 아니라 ― 학식(학적․이론적 지식)을 얻을 수 없어 공허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단과 오류의 위험 때문에 위태롭다는 말이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의 뜻은 첫눈에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명확한 명제는 불행히도 전통적 해석 속에서 오랜 세월 얕게 이해되거나, 사제지간의 ‘교학법(敎學法: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 명제나 학습법 명제로 피상화되어 해석되어 왔다.
전통적 해석은 하안(何晏), 형병(刑昺), 주희(朱熹)의 주석으로 대표된다.
하안은 “배우되 그 뜻을 찾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연하여 얻는 게 없고,
배우지도 않고 생각하면 끝내 얻지 못하고 헛되이 사람의 정신을 피로하고 위태롭게 만든다”고 주석한다.
형병은 이 명제를 사제지간의 ‘교학법’으로 해석하여 “이미 스승의 학(學)을 따랐으면 그 나머지 내용(餘蘊)을 스스로 생각해야 하니,
만약 스승의 학을 따를지라도 그 뜻을 찾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연하여 얻는 바가 없다.
… 스스로 찾고 생각하기만 하고 스승의 학을 찾아가서 따르지 않으면 끝내 그 뜻을 얻지 못하니,
헛되이 사람의 정신을 피로하고 게으르고 위태롭게 만들 뿐이다”라고 풀이한다.
주희는 “마음에서 그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혼미하여 얻는 것이 없고,
그 일을 되풀이하여 익히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고 불안하다”고 주석하고 있다.
교학법의 관점에서 풀이한 하안과 형병의 저 해석이나 학습법의 관점으로 빠진 주희의 이 해석은 둘 다 그 뜻이 참으로 얕다.
하안과 형병, 그리고 주희는 모두 공자의 명제를 인식방법론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저 ‘배움’이라는 말을 좁게 풀이하고 사제지간의 교학법이나 반복학습법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들의 해석은 다 피상으로 흐르고 말았고, ‘인식론적’ 이해가 결여된 이런 ‘학습론적’ 해석의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공자의 ‘학(學: 배움)’은 스승이나 책으로부터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역사적 과거의 옛것과 현재 세계로부터 배우는 것, 즉 ‘과거와 현재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선인(先人)의 책이나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간접적 형태의 경험’에 속한다.
따라서 자공은 공자의 ‘배움’도 스승․서책․과거의 옛일이나 외부세계로부터 배우는 ‘직간접적 경험 일반’의 광의로 풀이했다.
위나라 공손조가 자공에게 “중니 선생은 어디서 배웠습니까?”라고 묻자, 자공이 “문․무왕의 도가 아직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존재합니다.
그러니 현자는 그 중 대도(大道)라는 것을 알고 현명치 못한 자는 그 중 소도(小道)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문․무왕의 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어디서든 배우지 않으셨겠습니까? 어찌 또한 정해진 스승이 있었겠습니까?”라고 답했다.(<論語> 「子張」)
여기서 자공은 ‘배움’을 광의의 ‘경험 일반’의 뜻으로 사용하고 ‘스승’을 현자, 보통사람, 대상세계를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쓰고 있다.
마찬가지로 공자도 서적, 보통사람, 세상의 말, 행동, 세태, 사건을 듣고 보는 ‘경험’ 일반을 스승으로 삼아 배우라고 가르친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 중 선한 것을 택해 이를 따르고 그 중 선하지 않은 것은 고친다.
”(<論語> 「述而」) 따라서 공자에게 배움이란 곧 세상 경험이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한 협력적 지식 획득인 것이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는
“경험에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공허하고, 생각하기만 하고 경험에서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당연히 이 경험론적 관점은 경험을 배격하고 자기의 개인적 이성만을 믿고 생각으로만 지식을 쌓으려는 신적 천재의 선험적(先驗的) 방법을 거부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자는 자기가 나면서부터 아는 ‘신(神)’ 또는 ‘하늘처럼 인자하고 신처럼 지혜로웠다’는 요임금 같은, 신화와 전설 속의 ‘성인’이 아님을 자인한다.
나는 본성으로 타고나 저절로 아는 자가 아니라 옛것(경험사실)을 좋아하여
이를 힘써 구하는 자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 <論語> 「述而」
여기서 ‘옛것’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먼 과거든 방금 지나간 과거든 과거의 경험 또는 경험자료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후천적 ‘경험’ 또는 ‘경험자료’는 서구의 근대 합리론에서 생득적 ‘본유관념(innate ideas)’이라고 일컫는 ‘생이지지(生而知之: 본성으로 타고난 지식)’와 대립된다.
따라서 ‘옛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경험을 애지중지한다’, ‘경험을 중시한다’, ‘경험을 앞세운다’는 말이다.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 본성으로 타고나 아는 자)’는 ‘지식을 타고난 자’ 또는
‘타고난 지자’로서 전지전능한 신이나 종교적 신지자(神智者: 삼황오제 같은 신화적 성인, 신들린 신동․선지자 등)를 가리키거나,
플라톤․데카르트․칸트 같은 합리주의자들이 믿는 바의 선험적 ‘본유관념’을 타고나서 오만하게 신의 지위를 탐하는 합리주의적 인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아비생이지지자(我非生而知之者) 호고민이구지자야(好古敏以求之者也)’의 구절은 정확히 풀이하면
‘나는 합리론자가 아니라 경험론자다’라는 명제를 말하고 있다. (<공자와 세계 1> 188-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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